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 대기근 (문단 편집) === 고의적 제노사이드 설(과거의 제노사이드론) === 2010년대 후반 - 2020년대 이후엔 제노사이드론 학자들도 '고의적 기근설'같은 개념의 제노사이드설은 주장하지 않으며 대체로 복잡한 개념의 '제노사이드' 개념으로 설명하므로 해당 문단에서 설명하는 제노사이드 논쟁은 2010년대 후반 - 2020년대 이후의 주류 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아래의 고의적 제노사이드설은 2010-2020년대 기준으로 Andrea Graziosi 등의 주류 제노사이드론 학자의 개념론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읽어야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20세기 역사에서도 그 규모가 매우 컸던 기근으로, 이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 대기근은 분명 인재(人災)였으며, 우크라이나 인구의 10%가 희생될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남겼다. 또한 스탈린 정부가 이 대기근에 대한 사실을 덮으려고 정부 차원에서 정보 조작을 해 왔음은 역사적 사실이고 특히 우크라이나와 쿠반 지역에 대한 봉쇄 명령으로 많은 우크라이나인 및 쿠반 카자크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들었다. 라파엘 램킨(Raphael Lemkin)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1)우크라이나의 엘리트의 근절, 2)우크라이나 정교회 청산, 3) 우크라이나의 전통, 음악, 언어 등의 문화의 말살 4) 우크라이나 민족을 해체시키기 위해 타 민족들을 이주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제노사이드가 맞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그리고 그 외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집단살해로 인정한 국가들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를 잠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의 주요 기지가 되어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적군이 점령해 소련의 영토가 될 수 있었다. 대기근 당시 소련의 상황을 묘사한 《Havest of Sorrow》라는 도서에 의하면, 몰수한 식량을 서쪽으로 운송하여 바다에 버리거나 그대로 썩게 방치시켰다는 서술이 있다. 집단화 정책에 대한 저항이 가장 심한 곳은 토질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던 우크라이나였다. 유독 격렬한 농업 집단화에 대한 반발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는데 모스크바의 집권 세력으로서는 농업 집단화 완수와 혹시 있을 수 있는 각지의 분리주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그 논지이다. 후에 스탈린이 "독소전쟁보다 농민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다"란 표현을 하게 할 정도의 반항을 했으며, 그 방법도 집단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미리 파손 하는 것이었다. 당장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육류와 낙농, 채소 같은 농산물의 생산이 급감하여 1960년대에 흐루쇼프가 "아직도 계란 생산량이 대기근 이전보다 못합니다"란 말을 할 정도였다. 거기에 스탈린은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 젬스트보 산하에서 부를 축적한 쿨라크들을 수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개발과 집산화 과정에 방해되는 존재로 여겼다. 또한 스탈린은 1929년에 부하린과 지노비예프 등 다른 전연방 공산당 간부들을 모조리 축출하고 일당 독재에 입각한 좌익 전체주의 체제를 완성했다. 불안정한 기반 속에서 다른 간부들을 하나하나 쳐내며 절대 지도자가 된 스탈린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아직 숙청되지 않은 정적들이 스탈린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농업 국가였던 소련을 공업화된 국가로 바꾸기 위해 급진적인 중공업화 정책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농업으로 부를 쌓은 쿨라크들을 의도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강제적 중공업화 정책을 통해 우크라이나 지역을 착복해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식량 사정을 악화시켰다는 관점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인민을 돌보기는 커녕 수탈한 곡식을 수출하여 강국의 껍데기를 선전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대기근 때문에 원래 수탈량의 1/3만 걷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수탈량 산정 자체가 과도하게 높았다. 뒤늦게 1/3으로 줄여도 현지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이 없어지는 셈. 게다가 소련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 달리 철저하게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농부가 수확한 식량을 농부에게 남겨줄 최소한의 식량을 남겨주지 않고 전부 가져가버린 것도 한몫했으며 또한 대기근이 일어나기 전에 스탈린 정권이 농촌이 우익적인 풍토를 지향한다며 이를 배격하는 사건이 벌어진적이 있는데, 대기근이 발생할 당시 도시와 촌락 사이에 엄청난 사망자 차이가 있었던 등의 이유로 고의적 방치라는 주장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정책이 실패했으면 시정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에서 최소한의 대처도 마련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게다가 스탈린과 소련 정부는 기근에 대한 소식을 공개하는 것을 제한하였고 해외에는 공식적으로 기근이 없다고 거짓말하면서 외국의 원조 제안을 거절하였다. 또한 대기근 당시 소련에서는 예전보다 양이 적기는 하지만 계속 곡물을 수출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소비에트 측은 대기근의 존재를 비밀리에 부치면서 대기근이 극심한 우크라이나, 북캅카스, 돈강 유역에 대한 출입을 봉쇄하기도 했는데 외부 인사의 유입뿐 아니라 굶주린 농민들이 외부로 나가는 것 또한 통제했다. 이들의 이주나 탈출을 용인한다면 지역이 공동화되어 식량 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차를 타고 외부로 탈출하려던 어린이들이 당국에 체포되어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농촌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영양실조로 곧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들이 상당수 거주한 쿠반지역에 봉쇄명령을 내렸다. 일각에서는 농촌에서 도시로 기근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나 당시 똑같이 기근이 일어난 카자흐스탄의 경우 60만명의 난민이 성공적으로 기근이 일어난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는 똑같이 기근을 피해 이주하려다 다시 농촌으로 추방당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수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동유럽사의 권위자인 노먼 네이마르크 교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크라이나의 살인적인 기근은 대량 학살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 스탈린과 그의 부관들은 1932~33년 소련에 만연한 기근이 특히 우크라이나를 강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죽는 것을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그들은 구호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들이 소련의 도시나 다른 곳에서 스스로 식량을 구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너무 늦을 때까지 곡물 배달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기를 거부했다.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스탈린의 적대감과 그들의 "가정 통치" 형태를 유지하려는 그들의 시도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집단화에 저항했다는 그의 분노는 살인적인 기근을 부채질했다. 그런데 해당 구절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해당 구절에는 의도적 기근설을 의미하는 문구가 없다.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도 자신의 저서 "피에 젖은 땅: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932년이 저물어가는 몇 주 동안 외부의 안보 위협과 내부의 도전에 직면하지 않고 스탈린은 그의 통치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정당성 없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기로 선택했다. ...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식량 부족이 아니라 식량 분배였으며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결정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또한 스나이더 교수는 당시의 대기근의 원인이 식량의 부족이 아닌 식량의 분배가 문제였고 스탈린이 이 사태의 최고책임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건 위의 '스탈린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무지에 의한 인위성'과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티모시 스나이더는 아래의 복잡한 개념의 제노사이드 논쟁에 논문으로서 참여하고 있지는 않으며, 현재 제노사이드론에서도 티모시 스나이더와 달리 좀 더 진보적이고 복잡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티모시 스나이더의 저서는 그런 복잡한 학계 개념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